이데일리 전략포럼 2026 둘째 날, 세 기조연설자가 약속한 듯 같은 단어를 꺼냈습니다. '자강'. 그런데 같은 말인데 셋이 가리키는 뜻이 미묘하게 달랐어요. 곽재선 회장이 연 '자강의 시대'를, 저는 '불가결성'이라는 다른 키워드로 들었습니다. 그 차이를 짚었습니다.

이틀째도 같은 자리, 같은 백드롭이었어요. 체스판 위 검은 킹에 붉은 'POWER ORDER'. 첫날 햄리 회장을 듣고 저는 '중견국의 시대'보다 결국 미국 쪽으로 다시 쏠린다고 적었는데, 둘째 날은 그 생각이 더 짙어졌습니다. 곽재선 회장이 개회사에서 이번을 '자강의 시대'라 불렀고, 실제로 세 기조연설 모두 어디선가 '자강'을 입에 올렸어요. 그런데 들으면서 자꾸 걸린 게 하나 있었습니다. 같은 단어인데 셋이 말하는 뜻이 조금씩 달랐거든요.
첫 번째 연단, 렉슨 류
둘째 날은 렉슨 류 더 아시아 그룹(TAG) 사장이 열었습니다. 오바마 정부 백악관 NSC에서 북한·이란·시리아 핵 문제를 다뤘던 사람이라 그런지, 동맹을 보는 시선이 꽤 실무적이었어요. 그는 한미동맹을 '부담 분담'이 아니라 양쪽이 자본과 역량을 함께 넣는 합작(joint venture)으로 다시 쓰자고 했죠. 지분을 넣으면 테이블의 자리가 따라온다는 겁니다. 한국더러 이제 '패스트 팔로어'를 넘어 규칙을 쓰는 설계자가 되라고도 했어요. 다만 역량이 곧 리더십은 아니니, 조선·방산·원자력·AI·바이오 같은 데서 어디를 선도할지는 골라야 한다고 봤습니다. 정부와 산업이 손발을 맞추되 그게 관료적 통제는 아니어야 한다는 단서도 달았고요.
핵 얘기가 의외로 솔직했습니다. 핵연료 주기의 주권은 가는 게 맞지만 핵무장은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하다고 잘라 말했고, 한국이 그 선을 지킨 걸 높이 샀어요. 제일 오래 남은 건 마지막 한 대목입니다. 한국의 진짜 위험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 거래에서 '카드로 거래되는 것'이라는 말. 그래서 답은 단순하다고 했어요. 시스템과 공급망에 너무 깊이 박혀서 누구도 함부로 빼낼 수 없는 존재가 되라는 것. 자강은 고독이 아니라며, 그렇게 연단을 닫았습니다.
두 번째 연단, 벡과 신관호

벡 교수(EUI)는 시작부터 결이 달랐어요. 금융이 성장에 좋은 건 맞지만, 지나치면 독이라는 얘기였죠. 수학·물리·공학 전공자가 죄다 금융으로 빨려 들어가면 그게 과잉의 신호라는 비유에선 객석이 살짝 웃었습니다. 그는 요즘 돈이 기업보다 가계로 흐르고, 경제의 무게가 공장·기계 같은 유형자산에서 R&D·특허 같은 무형자산으로 옮겨가면서 '은행 중심' 금융이 성장에 덜 기여하게 됐다고 봤어요. 혁신·스타트업엔 은행보다 시장과 벤처캐피털이 맞다는 거죠. 뒤로 가면서는 달러 얘기로 넘어갔습니다. 무역전쟁, 제도 신뢰 훼손, 재정 불안, 금융의 무기화로 기축통화 지위가 조금씩 깎이고, 돈도 지정학 블록 '안'으로 갈라져 흐른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그 역시 결론은 '자강'이었습니다. 단, 담 쌓는 자급자족이 아니라, 달러에만 기대지 말고 국내 자본시장·통화의 체력을 키우라는 쪽이었죠.
대담자로 나온 신관호 한국금융학회장(고려대)은 한국 금융을 더 직설적으로 깠어요. 담보·부동산·은행 중심으로 커온 탓에, 정작 현금흐름은 좋은데 담보가 약한 혁신기업으론 돈이 안 간다는 겁니다. 생산적 금융은 기업대출을 늘리는 게 아니라, 돈이 어디로 가느냐 그 질을 바꾸는 일이라고 정의했죠. 환율 코멘트도 기억에 남아요. 요즘 원화 약세를 곧 위기로 보긴 어렵다고 했는데, 민간이 대외자산을 두둑이 들고 있고, 기업 환헤지도 늘었고, 외환위기 때 뇌관이던 단기외채도 관리되고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환율을 무조건 어떤 선에서 틀어막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거죠.
세 번째 연단, 허츠, 그리고 김지윤

허츠 교수(UCL, 『고립의 시대』 저자)는 지금 세계를 세 단어로 압축했어요. 분열·과열·공포. 보호주의는 갑툭튀가 아니라 예고된 흐름이고, 분열은 나라 사이뿐 아니라 나라 안에서도(세대·성별·계층) 깊어졌다고 했죠. 집 못 사는 청년, 기업과 민주주의를 잘 못 믿는 Z세대를 사례로 들었습니다. AI는 빨리 갖다 쓰면서도 아직 검증이 안 끝난 '과열'이라며, 가드레일과 비판적 사고를 강조했고요. 중간엔 짧은 영상을 틀고 "오리가 몇 마리 보이냐"고 물었는데, 같은 화면에서 누군 오리를, 누군 토끼를 봤어요. 서로 다른 걸 보는 사람을 한 팀에 두라는 얘기였죠. 그래도 비관으로 끝내진 않았습니다. 같은 시대에 혁신도, 창작도, 로봇도 외려 빨라지고 있다고 했어요.

이번 편의 척추는 대담자 김지윤 교수(연세대)가 잡아줬습니다. 그는 미국을 'America Inc.'라 불렀어요. 트럼프의 미국이 고립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운영 방식만 (가치·진영에서 득실·거래로) 바뀌었을 뿐 최강대국 자리를 내려놓을 생각은 없다는 거죠. 근거로 세 전선을 들었는데 꽤 그럴듯했어요. 하나는 기술입니다. AI를 안보로 보고 수출통제까지 손대는 흐름인데, 한 미국 AI 기업이 최신 고성능 모델의 외국인 사용을 막은 사례를 들었죠. 다음은 에너지. 데이터센터 전력수요와 원자력 르네상스로 가는 '에너지 도미넌스' 얘기였습니다. 마지막이 금융인데, 스테이블코인과 국채 수요로 결국 미국 금융권 안에 돈을 묶어두는 구조를 짚었어요.
그가 던진 질문이 며칠째 머리에 남아요. 미국이 그동안 떠안아온 '질서 유지의 비용'(항행의 자유, 함대 같은), 중견국 연대가 멋진 말이긴 한데, 그 청구서는 대체 누가 받느냐는 거였습니다. 1930년대 대공황을 두고 '영국은 능력이 없었고 미국은 의지가 없었다'던 킨들버거를 끌어오면서, 지금 미국은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어 보인다고 했죠. 연대니 협력이니 하기 전에 먼저 답해야 할 질문 아니냐고요.
오후 세션은 짧게
오후 세션은 토론 중심이라 한 사람 말을 길게 옮기긴 어려웠어요. 오간 얘기 중 기억에 남는 것만 짧게 추려봅니다.
세션1(경제·산업)은 탈세계화·블록화 속 한국의 '전략적 가치'와 공급망이 주제였습니다. 그사이 안종범 원장이 모두발언을 맡은 PERI 스페셜 심포지엄도 재정·금융 리스크를 짚었고요.
조세·재정 세션은 확장재정을 두고 의견이 갈렸어요. 규모보다 어디에 쓰느냐가 중요하고 채무비율도 선진국보단 낮다는 쪽, 그리고 '재정 착시'를 경계하며 미래세대 부담을 걱정하는 쪽이 맞붙었습니다. 통화·금융 세션은 중앙은행 '소통'이 화두였죠. 점도표·포워드 가이던스 얘기가 오갔는데, 너무 세게 예고하면 시장이 약속으로 받아들여 되레 발목 잡힌다는 경계, 아시아 금융이 달러에 과하게 기대 있다는 지적이 기억에 남아요.
뭉뚱그리면 오후도 결국 '바깥 충격에 안 흔들릴 체력' 얘기였습니다. 오전이 '자강'이었다면 오후는 그 각주쯤 됐고요.
의박이의 시선

종일 들으며 든 생각은 이렇습니다. 누구도 미국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자강은 말하지 않았어요. 렉슨 류는 미국 시스템에 깊이 박혀 빠질 수 없게 되라 했고, 벡과 신관호는 달러에만 기대지 말되 결국 그 판 안에서 체력을 키우라 했죠. 김지윤은 한술 더 떠, 미국이 그 판을 놓을 생각 자체가 없다고 했고요. 셋 다 담 쌓는 자강이 아니라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는 자강을 말한 셈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게 첫날 적은 '미국 쪽으로 다시 쏠린다'와 같은 말로 들렸어요.
물론 그렇다고 자강이 허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김지윤의 질문이 자꾸 걸리는 게 그래서예요. 미국이 져온 질서 비용을 이제 누가 치를 거냐, 중견국 연대가 답이라면, 그 몫을 우리가 얼마나 감당할 각오가 돼 있느냐는 거죠. 자강은 듣기 좋은 구호지만, 비용과 책임이 같이 따라붙는 단어라는 걸 이날 새삼 느꼈습니다.
투자하는 사람으로서 오늘 챙긴 한 줄도 종목이 아니라 방향이었어요. 힘이 다시 전면에 나선 판일수록, 그 힘의 중심이 어디로 움직이고 누가 비용을 쥐고 있는지를 먼저 봅니다. 거시는 매매 신호가 아니라, 그 위에서 세상을 읽는 렌즈니까요. 적어도 당분간은, 담을 쌓는 자강보다 그 큰 판 안에서 어떻게 불가결해질까, 그게 더 현실적인 물음으로 보입니다.
여담
여담 하나. 셋째 대담에서 김지윤 교수가, 첫날 햄리 회장한테 질문하려고 줄곧 손을 들었는데 끝내 차례가 안 왔다는 얘기를 웃으며 하더군요. 그 못 한 질문을 둘째 날 무대에서 푼 셈이죠. 그리고 포럼의 또 다른 낙은 역시 신라호텔 밥이었습니다(라는 건 안 비밀). 묵직한 세션 사이, 잘 차려진 한 상이 쉼표가 됐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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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17회 이데일리 전략포럼(2026.6.17, 서울 신라호텔) 렉슨 류·토르스텐 벡·노리나 허츠 기조연설 및 신관호·김지윤 대담 등 현장 청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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